최은영 작가님의 신작이 2년만에 나왔다. 그것도 첫 장편소설이다. 이전 두 권의 책도 무척이나 잘 읽었기에 망설임 없이 예약을 통해 구매했다. 무려 친필사인본^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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밝은 밤 - YES24

백 년의 시간을 감싸안으며 이어지는 사랑과 숨의 기록 『쇼코의 미소』 『내게 무해한 사람』 최은영 첫 장편소설공감을 불러일으키는 이야기와 서정적이며 사려 깊은 문장, 그리고 그 안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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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우리와 동시대를 살아가고 있는 주인공 '지연'이 짧았던 결혼생활을 끝내고 '희령'이라는 작은 지역에 둥지를 튼다. 희령은 아주 오래 전, 지연의 외할머니가 살던 곳으로 아주 잠깐 할머니와 보낸 즐거운 기억이 남아있는 지역이기도 하다. 외할머니는 엄마와 의절한 터라 지연도 외할머니의 소식을 모르고 살다 무언가에 이끌리듯이 희령으로 온다. 짧은 결혼생활이 안긴 상처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지연은 아무도 자신을 모르는 곳이 절실했다. 그런데 그곳에서 외할머니를 정말 우연히 재회하게 되고, 외할머니로부터 자신과 똑닮았다는 증조모의 이야기를 듣게 된다. 

 

2. 

책은 지연의 현재와 증조모 삼천의 이야기를 오가면서 전개된다. 증조모로부터 시작된 과거의 이야기는 할머니 그리고 엄마에게까지 닿을 수밖에 없는데, 이 4대에 걸친 이야기가 잔잔하면서도 폭풍처럼 전개된다. 증조모 삼천은 일제강점기 백정의 딸로 태어났는데, 시대 그리고 신분이 보여주듯 굴곡진 삶을 살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그 증조모와 웃는 얼굴이 똑같은 지연도 시대와 신분은 다르지만 지금의 사회에서 여전히 사람들로부터 상처를 받고, 그 상처를 안으며 살아간다. 

 

3. 

최은영 작가의 장기가 장편소설에도 발휘됐다고 생각했다. 사람 사이 관계의 복잡한 속성들과 미묘한 지점들, 그리고 그 안에서 개인이 갖는 복잡다단한 감정들을 구체적인 언어로 짚어내는 게 대단하다고 생각했는데 이 소설 또한 그러하다. 장편은 서사 자체의 힘도 있어야 하는데, 이야기의 흡입력도 좋았다. 

 

4. 

좋았던 문장들

 

- 그녀의 어머니는 그녀에게 어떤 일이 일어나든 빠르게 포기하고 체념하는 게 사는 법이라고 가르쳤다. 삶에 무언가를 기대한다고? 그건 사치이기 전에 위험한 일이었다. 어떻게 내게 이럴 수 있어? 왜 내게 이런 일이 일어나는 거지? 같은 의문의 싹을 다 뽑아버리라는 말이었다. 

 

- 허영심의 힘이 얼마나 센지 그녀는 알지 못했다. 

 

- 사람이 사람을 기억하는 일, 이 세상에 머물다 사라진 누군가를 기억한다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을지 알 수 없었다. 나는 기억되고 싶을까. 나 자신에게 물어보면 언제나 답은 기억되고 싶지 않다는 것이었다. 내가 기원하든 그렇지 않든 그것이 인간의 최종 결말이기도 했다. 지구가 수명을 다하고, 그보다 더 긴 시간이 지나 엔트로피가 최대가 되는 순간이 오면 시간마저도 사라지게 된다. 그때 인간은 그들이 잠시 우주에 머물렀다는 사실조차도 기억하지 못하는 종족이 된다. 우주는 그들을 기억할 수 있는 마음이 없는 곳이 된다. 

 

- 나는 항상 나를 몰아세우던 목소리로부터 거리를 두고 그 소리를 가만히 들었다. 세상 어느 누구도 나만큼 나를 잔인하게 대할 수는 없었다. 그래서 쉬웠을지도 모르겠다. 나를 함부로 대하는 사람들을 용인하는 일이. 

 

- 나는 바깥에서 슬픈 일을 겪었을 때 집에 와서 부모에게 이야기하는 아이가 아니었다. 울었다는 걸 들키지 않으려고 차가운 물로 세수를 한 뒤 집으로 가는 아이였다. 

 

- 우리는 둥글고 푸른 배를 타고 컴컴한 바다를 떠돌다 대부분 백 년도 되지 않아 떠나야 한다. 그래서 어디로 가나. 나는 종종 그런 생각을 했다. 우주의 나이에 비한다면, 아니 그보다 훨씬 짧은 지구의 나이에 비한다고 하더라도 우리의 삶은 너무도 찰나가 아닐까. 찰나에 불과한 삶이 왜 때로는 이렇게 길고 고통스럽게 느껴지는 것인지 이해할 수 없었다. 참나무로, 기러기로 태어날 수도 있었을 텐데, 어째서 인간이었던 걸까. 

 

- 자식은 엄마가 전시할 기념품이 아니야. 마음속으로는 그렇게 소리치면서도, 엄마의 바람이 단지 사람들에게 딸을 전시하고 싶은 것만은 아니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기에 마음이 아팠다. 

 

- (정말 제일 좋았던 페이지)

고통 안에서 시간은 직선으로 흐르지 않았다. 나는 자꾸만 뒷걸음질쳤고 익숙한 구덩이로 굴러떨어졌다. 다시는 회복될 수 없을지도 모른다는 조바심 서린 두려움이 나를 장악했다. 나는 왜 내가 원하는 만큼 강해질 수가 없을까. 이렇게까지 노력하는데도 왜 나아지지 않는 걸까. 

...

인내심 강한 성격이 내 장점이라고 생각했었다. 인내심 덕분에 내 능력보다도 더 많이 성취할 수 있었으니까. 왜 내 한계를 넘어서면서까지 인내하려고 했을까. 나의 존재를 증명해야 한다고 생각해서였을까. 언제부터였을까. 삶이 누려야 할 무언가가 아니라 수행해야 할 일더미처럼 느껴진 것은. 

...

어떤 성취로 증명되지 않는 나는 무가치한 쓰레기나 마찬가지라고 생각했다. 그 믿음은 나를 절망하게 했고 그래서 과도하게 노력하게 만들었다. 존재 자체만으로 의미와 가치가 있는 사람들은 자기 존재를 증명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하지만 나는 애초에 그런 사람이 아니었다. 

 

- 인간이 측량할 수 없는 무한한 세계가 지구 밖에 있다는 사실은 나의 유한함을 위로했다. 우주에 비하자면 나는 풀잎에 맺힌 물방울이나 입도 없이 살다 죽는 작은 벌레와 같았다. 언제나 무겁게만 느껴지던 내 존재가 그런 생각 안에서 가벼워지던 느낌을 나는 기억했다. 

 

- 타인에게 도움을 구하는 것이 내게는 가장 어려운 일이었다. 내가 도울 수 있는 일을 돕는 것은 쉬웠다. 내가 돕기 어려운 일을 돕는 것도 할 만했다. 하지만 나를 도와달라고 손을 내미는 일은 내게 불가능에 가까웠다. 아무리 힘들어도 다른 사람에게 징징대고 싶지 않았고 폐를 끼치고 싶지 않았으니까. 

 

 - 새비 아주머니는 그런 사람이었다. 사람의 노력을 알아보고 애쓴 마음을 도닥여주는 사람. 겨울에 빨래를 하고 있으면 손이 시리지는 않은지 물어보고, 장을 봐오면 다녀오는 길이 힘들지는 않았는지 물어보는 사람. 

 

- "착하게 살아라, 말 곱게 해라, 울지 마라, 말대답하지 마라, 화내지 마라, 싸우지 마라. 귀에 딱지가 앉도록 그런 얘길 들어서 난 내가 화가 나도 슬퍼도 죄책감이 들어. 감정이 소화가 안 되니까 쓰레기 던지듯이 마음에 던져버리는 거야. 그때그때 못치워서 마음이 쓰레기통이 됐어. 더럽고 냄새나고 치울 수도 없는 쓰레기가 가득 쌓였어."

 

- 얼마나 피곤했으면 이렇게 정신을 놓고 자나, 조금이라도 편하게 자면 좋겠다고 생각하는 마음. 별것 아닌 듯한 그 마음이 때로는 사람을 살게 한다는 생각을 했다. 어깨에 기대는 사람도, 어깨를 빌려주는 사람도. 

 

- 어머니는 내가 살면서 가장 사랑하는 사람이었어요. 무서워서 떨면서도 발걸음을 옮기는 사람. 나는 어머니를 닮고 싶었어요. 

 

5. 

지연의 성격과 사고가 너무 나와 닮아 읽으면서도 애가 탔다. 나도 나를 다그치는 데 능하고, 눈물이 밴 얼굴을 남들에게 들키고 싶지 않아하고, 도움을 주는 덴 익숙해도 도움의 손길을 구하는 건 영 어색한 사람인데. 소설속의 지연이 웃는 장면이 나오길 바랐다. 

그래서인지 지연이 묵혀둔 생각을 폭포수처럼 쏟아내는 문장이 마음에 많이 와 닿았다. 삼천과 할머니, 엄마로 이어지는 서사만큼이나 지연의 현재에도 마음이 머룰렀던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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