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을 담기로 한 이 카테고리에 글을 정말 오랜만에 쓴다. 그만큼 최근 몇 년간 내 일상에서 여행이 자리할 만한 여유가 없던 것이겠지.

지난 8월 울산에서 계모임 친구들과 만났을 때 한 친구가, "예전엔 잘 돌아다니더니 요샌 전혀 안 그래보여"고 말한 게 계속 머리를 맴돌았다.

그러고, 어떤 계기인지 지금은 기억도 나질 않지만 갑자기 지리산 둘레길에 엄청 가고 싶어졌고, 바로 오케이할 친구에게 연락했다. 답은 역시나 '대환영'.

 

친구가 월차 쓸 수 있는 날과 나 시험없는 날을 맞추다 보니 23,24일이 적기였다. 원래 25일 포함, 2박3일로 계획했지만 주중에 필기발표 한 곳이 나는 바람에 급하게 1박2일로 줄였다. 여행일정 하루 줄여야 한다고 말했을 때, 짜증났을 법도 한데 이해해줘서 너무 고마웠다ㅠ^ㅠ

 

친구와 가기로 한 코스는 9, 10코스였다. 코스를 정하기 전, 정말 우연히 한겨레 ESC 면에 지리산 특집이 나왔다. 눈 땡그래져서 꼼꼼히 읽었다. 계절별 추천코스가 달랐는데,

 

 

위 사진은 신문 읽으면서 손에 잡히는 포스트잇 메모한 내용. 위태~하동호 코스가 마을+숩길+계곡+임도 등 다양한 풍경을 볼 수 있다는 내용이 핵심이었다. 친구한테 사진찍어 보냈더니 좋다고 해 9, 10코스로 바로 결정.

 

코스를 정하고 나니 이후는 일사천리. 사실 뭐 할 것도 없이 숙소만 예약해두면 끝이었다. 버스 예매는 출발일 일주일 전에 각자 하고.

 

그렇게 코스는

1일차: 9코스(덕산-위태), 4시간 소요 예정, 위태에 위치한 정돌이네 민박 1박

2일차: 10코스(위태-하동호), 5시간 소요 예정, 하동호에서 농어촌버스를 타고 하동시내 버스터미널에서 각자의 집으로.

 

출발 당일, 나는 일곱시 반차로 서울남부발 원지행 버스를 타고 울산에 사는 친구는 일곱시 이십분 진주행 버스를 탔다. 서로 한번 갈아타야했는데 나는 원지에서 덕산가는 버스를, 친구는 진주에서 덕산가는 버스를 한번 더 타야했다. 둘다 다행히 덕산 도착하는 시간대가 잘 맞았다.(맞춘 것도 있지만)

 

 

덕산에서 친구 만나자마자 허기를 느껴 가까운 기사식당으로 향했다. 1인당 7000원에 비교적 저렴한 식당이었는데 제육에 비계가 많은 게 좀 흠이었다. 하지만 반찬이 죄다 맛있어서 잘 먹었다.

 

 

기사식당에서 잘 먹고 밖으로 나오니 둘레길이 어느 방향인지 전혀 알 도리가 없었다. 어리석게도 덕산정류장에만 도착하면 바로 둘레길 표지가 있을 거라 생각했던 탓이다. 서둘러 초록창에 검색해보니 '덕산 하나로마트' 쪽으로 우선 걸어가란다. 식당 아주머니에게 하나로마트 방향을 물어 쭉 걸었다. 하나로마트 근처에 작은 다리가 있는데 마트를 뒤로 한 채 다리를 건너간 후, 왼쪽으로 돌면 둘레길 표지판이 나온다.

 

본래 흰 페인트 바탕에 초록색으로 둘레길이라 적혀있었던 모양인데 지금은 그 형태를 알아보기 힘들었다.

 

9코스 덕산 -> 위태로 가려면 빨간색 화살표 방향대로 가야 한다. 검은색 화살표는 거꾸로 가는 방향, 즉 위태 -> 덕산 식으로 코스를 거꾸로 가는 이들을 위한 표시다.

 

9코스의 첫부분은 정말 무난하다. 포장도로 옆으로 논, 코스모스, 감나무, 작은 집들이 줄지어 있다. 사람 한 명, 심지어 개 한마리 조차 보이지 않아 친구와 단 둘이 고즈넉하게 걸었다.

 

 

 

 

안 익은 감이 많았는데 이 나무 혼자 잎도 다 떨어지고 벌써 까치밥만 남아 있었다.

 

중태휴게소. 둘레길 도장을 찍을 수 있었는데 친구나 나나 종이 한 장이 없었다ㅠ

지도를 가져가볼까 했지만 쉬는 날인지 문이 잠겨있었다.

대신 맞은편 정자에서 땀을 식히고, 화장실도 가고 잠시 쉬었다.

 

언니에게 지리산을 간다고 하니, '다이어트 캠프?'냐는 (말도 안 되는) 질문을 들었는데 정말 단식원이 있었다ㅋㅋㅋㅋ

도망가고 싶어도 한참을 빈 속에 걸어 나가야 하니 성공할 수밖에 없을 것 같은 단식원 장소.

 

이런 샷은 안찍기 아쉬우니

가는 길에 작은 구멍가게라도 있으면 좋으련만 전혀 보이지 않았다. 물병에 담아온 물은 이미 바닥을 보이는데ㅠ 그러다 정말 반갑게 집 앞에 나물을 다듬고 계신 아주머니가 계셔 염치불구, 물 좀 얻을 수 있을까 했더니 시원한 물도 주시고 오이 2개도 건네주셨다. 평소 오이 잘 먹지 않는데도 맛있게 잘 먹었다. 고맙습니다!

 

오이를 얻어먹은 이후로 본격적인 오르막길이 시작됐다. 땀이 좀 흐르는데? 생각했는데 이미 등은 땀범벅, 화장 다 지워지고

그러다 본격적인 산행처럼 준 등산길이 시작되는데 끝없이 오르다보니 둘레길도 마냥 쉽지는 않구나 싶었다. 그러다, 오르막길의 정점에 이를 때쯤 쉬고 계신 아저씨 세분이 사과와 유기농(?) 건빵을 건네주셨는데 땀을 엄청 흘리고 나서 먹는 사과 한 쪽은 꿀 맛이었다.

 

 

한창의 오르막길이 끝나면 이제 내려갈 일만 남았다.

특히, 중간에 나오는 대나무 숲길은 정말 인상적이었다. 바닥은 대나무잎으로 덮혀져 푹신푹신.

 

 

수확전의 노란 논을 볼 수 있는 시기에 와서 행운이었다.

 

 

위태마을에 도착해 정돌이네 민박 찾아가는 길에 본 해바라기.

 

꽤 높은 곳에 위치한 정돌이네 민박.

들어가니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 진돗개 한마리만 반겨줄뿐.

예약한 번호로 전화하니 아주머니는 즐거운 곳(?)에서 노시는 것 같아 전화가 들리지 않으니 문자를 남겨달라 하셨고, 문자를 남기려는 찰나 아저씨가 나오셨다. 안내해주신 방에 들어가니 차가운 바닥이 땀 범벅인 우리에겐 천국이었다. 방 하나*2명에 3만원이었는데 방이 엄청 컸다. 대자로 뻗어 누워있으니 아저씨가 배 하나와 사과 두개를 가져다 주시며 먹으라고 하시는데 대천사 강림의 순간. 냉장고에서 막 꺼내온 거라 차갑다고 하시는데, "아이고 감사합니다~"

 

 

식사도 제공해주시는데(주변에 식당이나 매점 전무, 식사를 민박이 아니면 할 수가 없는 곳이다) 한끼에 육천원이다.

밥도 많이주시고 반찬도 정말 맛있고, 특히 이날 저녁 먹은 배추국은 감동 그자체였다. 한번 더 떠다 먹음.

더 인상적인 건 우리 밥을 해주신 분이 주인 아주머니가 아니라 이웃집 아주머니셨는데 이런 식으로 자리에 안계실 때 품앗이 개념으로 서로 일을 봐주시는 것 같았다. 정말 자연스레 계란후라이를 하고 계시길래 주인분이신줄 알았는데 도와주러 오셨다고 말씀하셨다.

저 밥이 적어보여도 꽤나 푹푹 눌러 담은 고봉밥이었는데 클리어했다. 평소 쌀밥 잘 안먹는데 어찌나 맛있던지.. 쥬륵.. 김치 열무김치 최고였는데,, 밥먹으로 또 가고 싶다.

 

정돌이네 민박 예약하면서 걱정했던 유일한 것은 '정돌이'가 개라는 걸 인터넷에서 봤기 때문.(난 개를 무서워함)

그래도 선택지가 없으니 울며 겨자먹기로 예약했는데 개는 정말 온순하고 착했다. 신기한 게 둘레길 여행객은 기가막히게 알아보고 절대 짖지않는데 우리가 아무도 없는 민박집에 들어섰을 때도 앉아있다 일어났을 뿐 짖지 않았다. 그리고 사진 속 개는 정돌이가 아니라 정돌이 부인 '진순이'다.

 

정돌이네민박의 '정돌이'는 둘레길 안내견으로 유명해 티비방송에도 나왔는데 방송 출연 몇 번 후 이름 모를 사람이 정돌이를 맘대로 데려갔다고 주인아저씨가 말씀해주셨다.(아, 이맛헬) 현상금 50만원을 걸어도 찾을 수가 없어 이제 정돌이네민박엔 진순이와 진순이 새끼 뿐..ㅠㅠ

 

 

밥도 밥이지만 민박집에서 논을 내려다보는 풍경이 정말 끝내준다. 폰으로도 이정도의 사진이 나온다니 말 다했다.

 

9코스를 걸으면서 숱하게 본 감나무들 감이 언제 익는지 궁금해 친구가 아저씨께 물어보는 중에 아저씨가 먹으라고 홍시를 가져다 주셨다. 올해 첫 홍시!

 

담날 아침, 짐을 다 챙기고 떠나기 아쉬워서 찍은 사진. 이제 위태에서 하동호까지 가는 10코스! 시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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