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쾌발랄한 표지, 재치가 묻어나는 문장들이지만 눈물을 삼키며 읽었다. 막연하게 느꼈던 서러움을 얼굴 모르는 작가가 그 누구보다 잘 이해해주고 있다. '집밖의 세계를 일구는 둘째의 탄생'이라는 부제가 달린 이 책은 담론에서마저 밀려나있던 차녀들을 소환했다. 작가는 '차녀성'이라는 명명과 함께 둘째들을 불러모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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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녀 힙합 - YES24

가정이라는 정치적 장소에서처음 사랑하고 최초로 상처받으며 만들어지는 차녀의 세계마음 한구석에 켜켜이 쌓인 사소하고 미묘한 서러움과결코 채워지지 않는 결핍의 근원에 대하여내 성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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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여름 국제도서전 문학동네 부스에서 단연 눈에 띈 책. 와, 이제 차녀들을 소재로 하는 책도 나오는구나 해서 무척 반가웠지만 두손 가득 든 책들이 무거워 우선 눈도장만 찍었다. 동네도서관에 신간 신청을 한 후 뒤늦게 받아보고 부랴부랴 읽었다. 

 

1. 

작가는 사남매의 둘째다. 위로는 언니, 밑으로는 나이차가 한참 나는 남동생과 여동생이 있다. 꽤 오래 두자매의 막내로 살다가 늦둥이들이 태어나면서 언니와 동생들 사이에 껴버린다. 여기서 작가가 겪는 형제자매와의 관계는 한참 복잡해지는데 주로 장녀인 언니와의 관계에서 겪는 감정과 사연들이 나오기에 공감을 하며 읽었다. 

 

2. 

- 눈치를 보며 분위기를 풀려고 하는 내면의 중립 기어, 뭐라도 해야 나를 봐준다는 것을 일찌감치 깨닫고 키운 관종력, 제일 좋은 것을 선뜻 요구하지 못하는 머뭇거림은 보통의 차녀들에게서 공통적으로 발견되는 기질이었다.

(이 통찰에서 무릎 꿇음. 난 관종력은 없지만 '내면의 중립기어 + 머뭇거림'에서 누구한테 지지 않음 ^_^;)

 

- 그래서 작은 차이에도 민감하다. 당연하게 제 몫이 보장되는 첫째와 달리 끊임없이 남의 그릇을 힐끔거린다. 

(마찬가지다. 언니와 함께 자라며 언니에게 주어지는 몫들에 속이 상해 눈물 깨나 흘렸다.. 그마저도 대놓고 화내지 못하고 뒤에서 입 삐죽 튀어나와서 흐르는 눈물 닦아내기 바빴던 어린시절. 솔직히 성인이 되어서도 그랬다. 엄마는 두 딸에게 너무 좋은 사람인데 나는 날 향한 사랑의 크기가 조금 작은 것에 엄청 화가 나다가도 이내 이게 엄마를 원망할 일인가 싶어 마음을 다스렸다. 20대까지도 이런 마음의 훈련을 반복하니 20대 후반부터는 서운한 마음이 좀 덜 하다) 

 

- 공평하게 막대기가 하나씩 꽂힌 쌍쌍바조차 똑같이 쪼개지지 않는데, 물리적인 노즐이라고는 아무것도 없는 사랑이 어떻게 공평하게 딱 나뉘어 분사되겠는가. 

 

- 동성의 또래, 그리하여 비교 가능한 존재가 가장 가까이 있다는 것. 잘 때도 먹을 때도 웃을 때도 울 때도 쉴 때도 쌀 때도 그 존재가 내 시야에 얼쩡거리며 신경을 살살 긁는다는 것. 그 존재와 어린 시절 유일한 에너지 공급원이자 삶의 전부인 부모의 사랑과 인정을 두고 치열한 경쟁을 벌여야 한다는 것. 의도하든 의도하지 않든 굶주린 괴물처럼 입을 벌리고 상대의 자존감을 바각바각 갉아먹고, 또 그만큼 파먹힌다는 것. 

 

- 나의 계보이자 누군가의 곁에도 있을 우리의 .... 원망과 사랑, 연민과 이해가 마구잡이로 뒤섞여 들통에서 푹푹 끓는다. 

(작가의 할머니들 이야기. 많이 공감했다. 나의 할머니는 네번의 출산 끝에 낳은 첫번째 아들인 우리 아빠를 6남매 중 가장 사랑했고, 아빠의 아들을 간절히 바라셨다. 언니가 태어나고는 내가 아들이길 엄청 바라셨다는데, 딸인 걸 알고는 산부인과에 발길 한번 안주셨다지. 공부를 잘했던 언니와 내가 좋은 성적표를 가져오고 원하는 대학을 가고 직장을 잡을 때마다 꼭 끝에 덧붙이던  '아들이면 참 좋았을텐데'라는 말이 지긋지긋하게 싫었다.

그런데 우리 할머니도 사랑이 큰 사람이었다. 나는 세상의 모든 할머니가 손주들을 끌어안고 부엌에 나와 잠시 쉴 때면 볼과 손에 끊임없이 입을 맞추고 머리를 쓰담는 줄 알았으니까. 여생 내내 아빠의 자식들이 딸인 걸 아쉬워하셨지만 그 누구보다 우리를 예뻐하셨다. 정말 '원망과 사랑' '연민과 이해'가 뒤섞일 수밖에 없었다.)

 

- 내 몫의 애정이 언니보다 밀도가 낮다고 서러워만 할 때는 몰랐다. 상대적으로 느슨하고 무심한 정서적 연결고리가 그만큼 나를 자유롭게 한다는 것을. 

 

- 가족 구성원의 짬 처리반으로 살며 몸에 익힌 생존 기술은 자신을 내세우기보다는 주변을 두루 돌보고 항상 배려해야 한다는 한국 여성 훈육법과 만나 시너지를 낸다. 

 

- 첫째가 늘 양보해야 이유는 모든 것이 그에게 첫번째로 주어지기 때문이다. 그게 싫으면 둘째에게 먼저 주고, 얌전히 양보를 받으면 된다. (옳소!!!!)

 

- 나에게는 그런 자신감이 없었다. 내 욕망과 기분을 우선시하여 부모의 심기를 거스를 용기나 패기가 없었다. 그냥 엉거주춤 서 있다가 누군가 힘듦을 호소하면 여기저기 뛰어다니며 문제를 해결해주려고 애썼다.

(나를 관통하는 문장. 언니보다 엄마아빠의 기분을 더 살피고 애쓰는 이유. 서른이 되어서도 바뀌지 않는 듯) 

 

- 각종 예능에서 '딸 낳고 싶다'는 말을 가장 열심히 하는 부류는 남자 연예인이다. 자기가 낳을 것도 아니고 본인은 아들로서 '무뚝뚝해도 되는 권리'를 마음껏 누려놓고 정작 양육에서는 애교 많고 귀엽고 사랑스러우 딸 키우는 재미를 보고 싶어한다. (ㄹㅇㄹㅇ)

 

- 참을 수 없이 다른 사람에게도 말을 걸고 싶어졌다. 혹시 둘째냐고, 집에서 그다지 중요하지 않은 아이였냐고, 그래서 막연한 허기처럼 마음에 구멍이 뻥 뚫려 있냐고. 도대체 그 구멍이 어쩌다 생겼는지 궁금했고 더욱 파고들고 싶어졌다. 

 

- 특히 재밌었던 것은 자신의 설움을 토해내다가도 곧 "언니도 어렸죠" "엄마라고 그러고 싶었겠어요" "장녀도 힘들죠"라며 왔다갔다하는 지킬 앤드 하이앤드적 전개였다. 내글에서도 눈에 띄는 경향이라, 그런 점에서마저 공감의 불꽃이 피어올랐다.

(와....이거 완전 나잖아. 누가봐도 내가 화가 날 상황에서도 잔뜩 짜증을 내다가도 갑자기 중립기어를 걸면서 상대를 이해하려고 해보는... 아놔..) 

 

- 어릴 때부터 이런 피해의식은 불쑥불쑥, 김밥 속 청양고추처럼 혀를 얼얼하게 만들었다. 왜 나는 사소한 걸로 감정이 상하고, 분위기를 망칠까?

(정말 난 왜 이런 걸로 아직도 마음이 상하지?라는 생각에 마음 복잡해지는 차녀들..)

 

- 언제나 한발 떨어져서 내가 어느 정도 가질 수 있는지, 얼마나 가져도 되는지 가늠하고, 나 하나 때문에 사람들이 번거롭거나 귀찮을까봐 전전긍긍하는 성격. 눈치보거나 기죽지 않고 타인에게 자신이 원하는 바를 요구할 줄 아는 사람에게 느끼는 선망과 질투, 그게 바로 빈 언니와 나의 공통점이었다. 우리는 오래전부터 그걸 '차녀병'이라고 불렀다. 

 

- 사랑받고 싶고 인정받고 싶다는 욕망은 생명력이 질기다. 

 

- 어떨 때는 집에서 택배 상자 하나를 못 뜯고, 코트입은 채로 소파에 앉아서 몇 시간을 흘려보낼 때도 있다고 했다. "제가 '보는 눈'이 없으면, 다른 사람들의 평가나 요청이 없으면 움직이지 않더라고요." 혼자 있을 때의 무기력이 차녀로서의 인정욕구와 맞닿아 있었다는 이야기를 들을 때는 솔직히 뜨끔했다. 인정에 목을 매다 자기 자신을 가장 홀대하게 되는 아이러니. 

(하... 정말. 사회생활을 하고 친구들을 만날 때 의욕이 넘치고 잘해내려고 하는 나와 집에서의 혼자 있을 때의 나가 정말 다르다. 요새도 무기력하게 늘어져 있을 때가 많은데... )

 

- 누군가에게는 당연한 일이 누군가에게는 왜 이렇게 아쉬운지, 사람들이 왜 '별것도 아닌 일'로 갑자기 울음을 터뜨리곤 하는지를 절절이 이해하기 때문에. 

 

3.

책을 읽으며 떠오르는 에피소드들이 무궁무진했다. 그리고 바로 눈물이 고였다. 왜냐? 아직도 겁나 서러우니까 ㅜㅜ 

 

가족들을 잘 챙기고, 기념일들을 잘 기억하는 건 사실 애쓰는 거다. 이게 나의 역할 같으니까. 이걸 안챙겨도 되어도 부모에게 사랑받을 수 있다는 자신감이 차녀들에겐 적다. 

 

첫째딸은 엄마의 영원한 첫사랑이라는 구절을 읽고는 엄마를 조금은 이해하게 됐다. 

 

4. 

이 책 읽고 운전하면서 팟캐듣는데 청취자가 보내온 사연이 장녀로서의 서로움과 고충을 토로하는 내용이었다.

"거봐, 장녀들은 이렇게 자기들 힘들다고 난리지. 이렇게 온 사회가 장녀 힘들다는 거 다 알아주는데 말이야. 동생들은 이제야 막 이야기를 꺼낸다고"

하다가

"그래,,그래도 장녀 힘들긴 하지 한국에서"로 다시 중립기어 박아버리는 떼려야 뗄 수 없는 이 죽일 놈의 차녀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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