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판사 푸른숲에서 독서모임 플랫폼 '그믐'과 손잡고 진행한 위화 작가의 신작 <원청> 미리 읽어보기 이벤트를 신청해 책을 미리 읽어보았다. 요새 재밌게 읽은 책들 상당수가 푸른숲에서 낸 책이길래 출판사 인스타도 팔로우해서 보고 있던 터였다. 위화 작가 책을 간만에 접해보는 것이라 기대도 컸다.

예~~~전에 중국 여행할 때 위화 작가 신작을 서점에서 보고는 한국 출간되기 전이길래 이상한 부심에 끌려 사온 적이 있다. 읽는 속도가 너무 더뎌 완독 못하고 결국 포기했는데 얼마 지나지 않아 한국에서도 번역돼 나왔다. '원서로 언젠가 읽을거야!!'라는 생각에 한국에서 출간된 건 따로 구해 읽지 않았는데 지금 보니 이 역시 푸른숲에서 출간했다. 2018년에 나온 <글쓰기의 감옥에서 발견한 것>이란 책이다. 생각난 김에 원서 다시 중국어 공부할 겸 시작해야겠다... 

 

가제본 <원청>. 정식 출간되는 책은 당연히 표지가 다르다.

 

1.

책 같이 읽기 기간이 약 한달간이라 미루고 미루다 어제 책을 집어들었다^^; 메일로 매일 담당 편집자님의 질문 메일이 오는데 확인하면서 마음의 짐으로 남아있다가 주말 약속 취소된 김에 맘 잡고 펼쳤다. 중간에 몇시간 쉬긴 했지만 하루 꼬박 걸려 다 읽었다. 이야기를 워낙 잘 쓰는 작가이기도 하고, 이 거대한 이야기가 주는 힘이 대단하다. 중간에 울기도 했다. 책 보다 이렇게 눈물 흘리기는 정말 간만이었다. 

 

2. 

이 책은 1910년대 중국을 배경으로 한다. 1910년대는 중국뿐만 아니라 한국도 엄청난 격변기였기에 이 시대를 배경으로 한다는 정보 하나만으로 소설 속 주인공들이 얼마나 굴곡진 인생을 살게 될까에 대해 짐작하게 된다. 작가가 한국어판 서문에도 "저는 그런 난세 속 대한제국에도 <원청> 같은 이야기가 있었는지 궁금합니다"라고 밝힌다. 

 

3.

책은 중국 남부지방에 있을 것으로 추측되는 '시진'이라는 지역에 어느날 나타난 '린샹푸'라는 남자를 소개하며 시작된다. 그는 커다란 봇짐을 지고 갓난아기인 딸을 안고 다니며 젖동냥을 한다. 그는 어디에서 왔고, 왜 이곳에 머무르는가. 

린샹푸는 북방지역 린가 가문의 도련님이다. 아버지와 어머니를 일찍 여의고 혼자 큰 벽돌집에서 살아가는 그는 집안일을 돕는 톈가 집안 아들들과 함께 농사일을 하고, 목공일을 배운다. 평온하지만 어딘가 따분하게 살아가던 그에게 '아청'과 '샤오메이'가 나타난다. 경성으로 이동하고 있다던 그들은 하룻밤 재워주기를 청하고 린샹푸는 선뜻 받아들인다. 다음날 아청은 사정상 혼자 먼저 떠났다가 샤오메이를 데리러 와야겠는데, 그동안 샤오메이를 맡아줄 것을 부탁한다. 샤오메이가 신경쓰였던 린샹푸는 이 부탁 역시 흔쾌히 받아들이고 아청은 떠났다. 하지만 돌아오지 않았다.

린샹푸는 샤오메이에게 결혼을 청하고 샤오메이도 거절하지 않는다. 마을 주민들의 축하 속에서 결혼을 한 그들은 안정된 삶을 이어가는데 어느날 샤오메이가 린샹푸 집안이 몇대를 거쳐 모아온 금괴를 들고 사라진다. 린샹푸는 분노와 그리움이라는 상반된 감정의 소용돌이 속에서 이전의 생활을 이어가던 와중 어느날 배가 부른 채 부푼 발로 샤오메이가 찾아왔다. 그의 아이마저 데려갈 수 없다는 샤오메이는 린샹푸의 용서와 환대 속에서 딸을 낳고, 린샹푸는 샤오메이가 또 떠날 수 있다는 불안함을 느끼면서도 찾아온 행복을 맘껏 누린다. 그러던 어느날 샤오메이가 또 사라졌다. 딸을 둔 채. 금괴도 하나 손대지 않은 채. 

린샹푸는 이번엔 마냥 기다리지 않기로 했다. 딸을 안고 샤오메이를 찾아 나서기로 마음 먹었다. '원청'이란 지역에서 왔다던 아청의 말 한마디에 기대서, 아청과 샤오메이가 쓰던 사투리에 기대서 샤오메이의 고향을 찾아 나선다. 

 

4.

600페이지에 이르는 두툼한 분량인데도 흡인력 높은 이야기 덕분에 술술 읽혔다. 이야기 전반의 핵심이 되는 린샹푸라는 인물의 발걸음을 따라 이 책도 중국 북부지역과 남부지역을 오간다. 

작가의 서문을 읽고 시대에 휩쓸리는 인물의 격랑이 나타날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초반부에는 린샹푸라는 주인공이 시대보다는 개인적인 이유로 험난한 인생을 겪게 되는 것처럼 나온다. 근데 책을 끝까지 읽고 나면 어쩌면 그가 샤오메이와 만나게 되는 우연도 시대와 무관하지 않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샤오메이를 찾기 위해 시진에 머무르다 이내 정착하는 린샹푸와 시대가 겹쳐지게 되는 본격적인 장면들은 토비의 등장부터다. 잔혹하기로 유명한 토비들은 청나라 멸망 후 강력한 중앙권력이 사라져 혼란한 시기에 나타난 도적떼다. 책에 묘사되는 그들의 악행은 너무 잔인하고, 위화 작가가 또... 너무 끔찍하게 그를 묘사해서 책 읽다가 처음 위기가 왔다. 이런 무질서의 시대에 가장 취약한 건 역시 여성이라는 생각이 들어 또 암담했다.  특히 가장 악랄한 토비였던 장도끼는 인간의 탈을 쓴 짐승이라고 해도 모자랄 정도로 끔찍한 인물이라 빨리 죽어줘,,,,,,바라면서 읽었다. 

공권력이 무너진 이후의 세상은 아마 <원청>에 나오는 시진 일대처럼 하루하루 살아남는 게 가장 중요한 과제가 될 것이다. 

 

5. 

그런데 같은 시기에 상하이는 완전히 별세계다. 샤오메이가 아창과 함께 찾은 상하이는 근대화의 정점에서 돈을 흡수하면서 급속 성장하고 있었다. 1910년대 근대화라는 시대적 배경을 더 잘 보여준 건 오히려 상하이 부분이었다는 생각을 했다. 

 

6. 

(*스포*)

 

- 린샹푸가 유언으로 남긴 편지를 읽고 시진으로 찾아온 톈가 형제의 이야기를 보면서 눈물이 났다. 특히 린샹푸와 톈다의 관계가 애틋한데, 린샹푸를 보기 위해 주검으로라도 찾아온 톈다의 사랑이 눈물샘을 자극했다. 톈다는 린가 집안의 일을 돕는 사람이지만 린샹푸가 아기일 때부터 그를 돌 본, 어떻게 보면 세상을 일찍 떠난 부모보다 더 부모처럼 린샹푸를 지켜온 사람이었다. 린샹푸가 톈다와 계급적 차이를 크게 두지 않고 함께 일하는 모습에서도 둘의 관계가 신기하다고 생각했는데, 어떻게 명명해야 할지 모르겠는 이 관계가 책의 그 어떤 두 사람보다 절절하다고 느꼈다. 

 

- 천융량 무리와 토비가 싸우는 걸 보고 일반 사람들은 누가 토비인지 구분할 수 없었다는 문장도 굉장히 간결했지만 의미심장했다. 

 

- 토비들이 사람들을 납치해가서 고문하는 장면은 정말 끔찍했다. 난세에 영웅난다는 말이 있듯 난세에 인간의 탈을 쓴 악마도 나타나는 셈이다.

 

- 구이민이라는 인물은 굉장히 입체적으로 느껴졌다. 장사꾼인 만큼 돈에 욕심이 많고, 겉치레에 신경써 여덟명이 끄는 마차를 탈 만큼 속물이면서도 자신을 구하려다 죽은 린샹푸의 마지막을 끝까지 배웅하는 모습엔 우정과 의리도 느껴졌다. 그의 아들들 묘사는..흠...예...

 

- 린샹푸가 샤오메이와 결혼하지 않고 매파가 소개시켜준 류펑메이와 결혼했다면 평온한 삶을 살다 생을 마감할 수 있었을까? 라는 생각도 해봤는데 그렇지 않았을 거 같다. 시대의 풍랑에서 벗어날 수 있는 지역과 사람은 없었으니까 가을이면 낙엽이 지고 엄청난 추위가 찾아오는 린샹푸의 고향에도 토비가 다른 얼굴로 찾아왔을 것이다. 

 

- 책을 보면서 소름끼쳤던 부분이 '또다른 이야기'라고 해서 샤오메이와 아청의 히스토리를 풀어내는 두번째 챕터. 

아창의 남색 장삼과 샤오메이가 만든 아기옷과 신발, 모자의 퍼즐이 앞 챕터와 맞춰지면서 완전 소름 돋음... 위화 당신 천재..?

 

7.

인상 깊었던 문장

- 어렴풋하게 '나뭇잎은 떨어지면 뿌리로 돌아가고 사람은 죽으면 고향으로 돌아간다'라는 구절이 보여 구이민은 눈가가 촉촉해졌다.

(예전에 본 중국영화 <낙엽귀근>이 생각난 구절. 이 영화에도 저 문장이 그대로 몇번이고 인용된다. 영화의 핵심 메시지이기도 하고)

 

- 톈시 형제들은 큰형과 도련님을 끌며 겨울의 따사로운 햇살 속에서 먼 길에 올랐다. 린샹푸가 어렸을 때는 톈다의 목말을 타고 늘 둘이 함께 마을과 벌판을 돌아다니더니 이제는 나란히 누워 떨어지는 나뭇잎처럼 뿌리를 향해 돌아가고 있었다. 

 

- 오로지 결혼식 날만 두 손을 소맷자락에 넣은 채 줄줄이 들어왔다가 또다시 두 손을 소맷자락에 넣은 채 줄줄이 떠난 게 전부였다.

 

- 죽은 듯 고요하던 그들의 삶이 시리촌을 떠나 선뎬으로 가는 대나무 지붕 배에서 흔들리기 시작하더니 상하이에서는 인력거처럼 내달리고 있었다. 

 

- 아기가 웃는 걸 보고 마을 사람들이 앞다투어 다가와 그 말을 했다. 어떤 사람이 우스꽝스러운 어투로 묻자 아기가 깔깔거리며 웃었다. 이어서 다른 사람들도 어투를 바꿔 말을 걸기 시작하면서 아기의 깔깔거리는 웃음소리가 끊임없이 이어지고 대파 두 뿌리가 쉼 없이 흔들렸다.

(린바이자를 아끼는 마을 사람들의 모습에 마음이 뭉클. 모두가 귀히 여긴다는 미스터 션샤인의 애기씨가 떠오름)

 

- 아창과 샤오메이는 서로를 보고 있었지만 사실 아무것도 볼 수 없었다. 아창의 눈에는 당혹감만 가득하고 샤오메이의 눈에는 눈물밖에 없었다. 당황한 눈은 맞은편의 눈물을 보지 못했고 눈물 속 눈은 맞은편의 당혹감을 볼 수 없었다. 

두 사람은 우물과 강물처럼 처지가 달랐다. 한 사람은 우물에 대해 생각하고 다른 사람은 강물에 대해 생각했다. 

 

- 그 뜬구름 같은 원청은 샤오메이에게 이미 아픔이 되었다. 원청은 린샹푸와 딸의 끝없는 유랑과 방황을 의미했다.

 

- 그렇게 샤오메이가 땅에 묻혔다. 생전에 청나라의 멸망과 중화민국의 설립을 겪었던 그녀는 죽어서 군벌의 혼전과 토비의 난무를 피하고 도탄과 파탄에 빠지지 않을 수 있었다.

(중략) 샤오메이는 17년을 기다린 뒤에야 그곳에서 린샹푸와 만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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