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국 한달이 지나서 쓰는 뒤늦은 무주산골영화제 후기.

6월초, 사흘간 무주산골영화제를 찾았다.

 

지난해에도 가고 싶었던 영화제였는데 코로나 상황으로 표를 제한적으로 팔다 보니 티켓팅에서 광탈하고는 맘을 바로 접었었다. 올해는 다행히 거리두기가 많이 풀려 작년보다는 훨씬 예매가 쉬었다. 

무엇보다 올해는 무주산골영화제가 10년차를 맞은 해. 기념비가 되는 해이다 보니 볼거리가 더 풍부할 것이란 기대감이 컸고, 5월부터 하나둘 올라오는 영화 라인업을 보면서 이번엔 꼭 가봐야지 싶었다.

 

무주산골영화제는 프로그래머가 영화제 시작 전에 정기적으로 올해 영화제에 관한 글을 써 홈페이지에 올리고 뉴스레터로도 보내준다. 그 글을 보니 무주산골영화제는 원래 무료로 진행됐는데 올해부터 유료로 전환됐단다. 영화제 규모가 커지거 이를 찾는 관객들이 많아졌고, 영화제 방향성을 새로 잡아가야 할 시기라는 설명이 있었다. 이에 맞물려 영화제 측에서도 올해 새로운 프로그램을 선보였는데 GV에 평론가나 작가, 기자 등을 불러 영화에 관해 이야기를 나누는 토킹시네마가 그것이었다. 

영화별로 예매를 진행하다보니 어느 요일에 관객일 몰릴지도 영화제 측에서 보다 정확히 파악하고 있다는 점도 새로웠다. 유료 전환이 단순히 수익 측면에서만 생각할 게 아니라는 점에서! 프로그래머는 나와 친구가 영화제에 간 첫날인 4일 영화 예매율이 가장 높다고 했는데,  4~6일을 참석해보니 역시 4일이 관객들이 가장 많았다.

 

무주산골영화제는 4일부터 6일까지. 3일을 연달아 갔다. 30대의 체력을 무시한 과한,,, 스케줄이었다는 건 6일 밤에 집에 돌아와 깨달았다..ㅎ

 

1.

무주산골영화제를 찾은 첫날, 처음 본 영화는 에리크 크라벨 감독의 <풀타임>이다. 국내에선 내년 개봉 예정이고, 전주국제영화제에서 공개된 적이 있다고 한다.

영화제를 찾은 관객 모두에게 나눠주는 이 프로그램북이 매우 알찼다.

영화는 처음부터 끝까지 숨가쁘다. 파리 근교에서 아이 둘을 홀로 키우는 엄마 쥘리가 철도 파업이 한창인 시기에 파리 시내에 있는 일터로 나가는 장면으로 영화는 시작된다. 새벽 여명조차 없는 어두컴컴한 시간대에 알람 소리 한번에 눈을 뜬 주인공은 아이들 아침을 챙기고 아이들을 돌봐주는 이웃집에 가 애들을 맡긴 후에 바로 미친듯이 기차를 타러 달려간다. 영화가 시작된 지 10분도 안되는 순간에도 쥘리의 고단함이 느껴지는데 사실 파리에 기차를 타고 무사히 갈 수 있는 영화 초반부가 쥘리에게는 그나마도 평온한 시절. 

 

파업으로 파리 시내와 근교를 오가는 열차들이 다 끊기고, 대안을 마련할 수 없어 발을 동동거리는 쥘리의 모습이 영화 내내 이어진다. 이런 상황은 홀로 살아가는 사람에게도 벅찰진대, 아이 둘을 케어해야 하는 엄마인 그녀에겐 너무 버겁기만 한 상황. 게다가 쥘리는 호텔 청소일을 하고 있는데 출산 전 하던 직무로 직장을 바꾸기 위해 없는 시간조차 쪼개 면접을 보러 다닌다. 

 

하지만 쥘리가 맞닥뜨리는 현실은 그에게 호락호락하지 않다. 파업으로 지각을 일삼는 쥘리가 업무 시간에 다른 회사 면접을 보러다니자 그녀를 해고하려는 직장 상사, 약속된 시간에 아이들을 데리러 오지 않자 더이상 애들을 봐줄 수 없다고 선언하는 이웃집 할머니, 양육비를 보내지 않으면서 전화를 피하는 전 남편, 대출금 상환이 늦어지고 있다고 독촉전화를 거는 은행, 잔액이 얼마 남지 않은 통장.. 이 모든 악재들 속에서도 쥘리는 아들의 생일선물을 준비하고, 파티를 열고, 원하는 회사에 면접을 보러다니며 애를 쓴다. 

 

영화가 끝나고는 정희진 작가와 김혜리 기자의 GV가 한시간 이어졌다. 두분 다 너무 좋아하는 분들이라 보기 전부터 기대가 컸는데 이번 영화제에서 참여한 GV 중에서 가장 좋았다 흑흑ㅠㅠ 특히 정희진 작가님은 한창 한겨레 토요판에 칼럼 연재하실 때 글에 반해서 책도 사서 읽고 했는데, 말씀하시는 건 처음 봤다. 생각보다 훨씬 유쾌한 성격인데, 그 유머러스함마저 말하고자 하는 지점을 향하고 있어서 내공이 느껴졌다. 혜리기자님의 글쓰기가 우주최강이라고 칭찬하시는데, 옆에 계신 혜리기자님 무척 쑥스러워하심ㅋㅋㅋㅋㅋㅋㅋ

 

정희진 작가는 <풀타임>을 여성영화로 분류하는 것에 반대의견을 내셨다. 이건 신자유주의가 진행된 현 시대 노동자의 영화에 가깝다는 게 작가님의 생각. 화이트칼라와 블루칼라간 이동이 매우 손쉬워진 상황에 주목해야 한다고 했다. 사회를 안정적으로 돌아가게 하는 중산층의 두께가 얇아졌다는 뜻이기 때문. 

게다가 영화에 등장하는 다양한 여성노동자들의 태도를 이야기하면서 이건 세대차이가 아니라 각 세대가 겪는 자본주의의 모습이 저마다 다르기 때문이라고 설명하신 부분도 인상적이었다. 내가 지금 겪는 자본주의와, 내 윗세대가 겪었던 자본주의, 그리고 미래 세대가 겪을 자본주의가 다르다보니 이게 겉보기에는 세대차이처럼 느껴지지만 사실상 자본주의가 안좋은 방향으로 바뀌고 있다는 것. 

 

또 하나 인상적인 점은 쥘리가 여러 고난에도 자기 연민이나 슬픔을 느끼는 모습을 보여주지 않는다는 거다. 쥘리가 눈물을 흘리는 장면은(마지막 장면 제외) 잔고가 없어 딸의 저금통에서 돈을 빼낸 다음 화장을 하면서 눈물을 훔치는 부분이 유일했다.  

 

아, 영화 외적인 문제지만 영화 상영 10분만에 송출의 문제로 영화를 처음부터 다시 봤다. "필름클럽 사연 단골소재인 영화 송출 사고를 드디어 나도 겪는가???!!!"라는 생각에 마스크 안에서 입꼬리를 올렸지만... 영화 자체가 관객에도 쉽지 않다보니 또 숨가쁘게 영화를 다시 봐야 해 힘들긴 했다.. 

 

어탕수제비

영화를 보고 한시간 가까이 GV를 듣고 나니 어느덧 저녁 시간. 영화제가 열린 곳에서 차를 타고 10분 정도 가면 나오는 '무주어죽'에서 어탕수제비를 먹었다. 어죽국수를 먹을까도 고민했지만, 옥천에서 한번 맛을 봤기 때문에 이번엔 수제비를 골랐다. 2명이서 중(中)자를 먹었는데 배부르게 잘 먹었다. 반찬도 맛있었음. 

 

다시 영화제로
등나무운동장

저녁을 먹고 와서는 등나무운동장으로 향했다. 등나무운동장에는 이번 영화제에 참여한 여러 브랜드들의 스토어가 있었는데 맙소사.. 운영시간이 저녁 6시까지인 걸 전혀 모르고 뒤늦게 들어왔다. 쓰던 헌 칫솔을 가져가면 새 칫솔로 바꿔주는 행사를 하는 곳이 있어서 칫솔까지 챙겨갔는데 ㅠㅠ 

 

4일 등나무운동장에선 10cm의 공연이 있었다. 역시 이런 페스티벌에 강한 솨람.... 나도 참 옛날 사람이라 느낀 게 최신 노래는 잘 모르다가 공연 뒷부분에 불러준 '아메리카노', '사랑은 은하수다방에서' 에 몹시 흥이 났다 ㅎㅎ

 

이어 찰리 채플린의 무성영화 <키드>와 선우정아의 콜라보. 영화에 맞춰 선우정아가 노래를 부르는데 영화와 노래가 너무 근사하게 잘 어울렸다. 영화는 기둥에 가려 잘 보이지 않았지만, 그렇게 봐도 재밌게 느껴질 만큼 재밌었다. 찰리 채플린,, 당신 정말 천재...

 

아쉬운 점이라면 등나무운동장은 영화 보기에 그렇게 최적의 장소는 아니라는 점. 기본적으로 돗자리 깔아두고 먹고 마시려는 사람들이 많아서 소란스럽고, 입장권도 인원 제한 없이 팔아서 사람수 자체도 무척 많았다.. 그래도 본격적인 무더위가 찾아오기 전인 6월 초에 선선한 공기를 맡으면서 영화를 볼 수 있다는 점은 무척 매력적이었다.

 

예, 이것이 무주산골영화제의 꽃 '덕유산대집회장'

무주는 동네가 굉장히 작다. 그렇다보니 영화제 장소 부근의 숙소 자체도 별로 없거니와 그마저도 발빠르게 사람들이 예약을 했다. 그래서 매일을 무주-세종을 오갈까도 고민했는데, 그렇게되면 덕유산대집회장에서 영화를 볼 시간이 안난다는 게 아쉬웠다. 

차선으로 택한 게 무주 구천동의 펜션의 숙소. <키드>를 본 후에 숙소로 이동해 - 숙소 가는 길 정말 어두컴컴합니다.. 무서워- 잠시 쉬었다가 대집회장으로 갔다.

대집회장까지 차를 가져갈 수 있을 줄 알았는데 대집회장까지 가는 도로에 차를 진입하려면 덕유산 캠핑장 예약자여야 했다. 그렇지 않다면 주차장에 차를 대놓고 셔틀버스를 타야 한다. 다행히 셔틀버스를 기다리지 않고 바로 탈 수 있었다. 

 

하마구치 류스케 <드라이브 마이카>

우리가 영화제에 있었던 삼일동안 대집회장에서 틀어준 영화는 대부분 이미 봤던 것.(<노마드랜드> 하나 안봤다) 그 중에 끌리는 영화들이 마침 4일에 상영해서 타이밍이 좋았다. 대집회장에 도착하고 보니 하마구치 류스케의 <드라이브 마이카> 상영이 한창이었다. 사진 속 장면은 드마카 중에서도 가장 좋아하는 씬. 

 

밤의 덕유산대집회장은 역시 무척이나 추웠다. 블로그에서 일교차가 엄청나다는 후기를 봤었기에 담요며 핫팩이며 챙겨갔는데, 베개와 이불을 챙겨와 누워 보는 사람들을 보니 너무 부러웠다..흑... 베개 필수품인듯. 

 

<듄>까지 보려고 했는데 정말 너무너무너무..피곤해서 드마카가 끝날 때쯤 대집회장에서 빠져나왔다. 다시 보고 나올 때도 셔틀버스를 타고 차를 대둔 주차장으로 갔다. 후기 말미에도 적겠지만 무주산골영화제는 전반적인 행사 운영, 스탭분들의 친절도와 노련함이 정말 최고였다. 다소 번잡하고 혼란스러울 수 있는 덕유산대집회장 셔틀버스 안내도 정말 매끄러웠다(최고최고b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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