봐야 할 영화 목록이 있다면 항상 상위권을 차지했을 '패왕별희(1993)'를 감독판 재개봉에 맞춰 드디어 보았다. 내가 태어난 해에 개봉한 오래된 영화지만, 1993년 46회 칸영화제 황금종려상 수상에 걸맞게 지금 봐도 영화가 주는 울림의 깊이는 여전했다. 

 

영화 '패왕별희'하면 바로 떠오르는 이미지, 청데이가 연기한 우희의 모습. 

영화는 어느 빈 체육관(?)에 청데이(장국영)'와 단샬루(장풍의)가 경극 '패왕별희'를 연습하겠다며 들어서며 시작된다. 이곳의 관리를 맡고 있는 한 인물은 경극 분장을 한 청데이와 단샬루의 얼굴을 보자마자 경극을 본 지도 정말 오래됐다는 말을 던진다. 이내 그는 무대 연습을 하려는 그들을 위해 조명을 켜주겠다며 자리를 뜨고, 이제 청데이와 단샬루의 이야기가 본격적으로 시작된다. 

 

청데이(아명 두지)는 매춘부인 엄마가 베이징의 한 경극단에 자신을 맡기면서 경극과 인연을 맺게 된다. 청데이는 육손으로, 경극단의 사부는 처음 그의 외관을 보고는 무대에 서기엔 좋지 않다며 청데이의 입단을 거절한다. 하지만 아이를 매춘부 소굴에서 키울 수 없다는 엄마의 광기 어린 집념은 청데이의 여섯번째 손가락을 칼로 도려냈고, 그렇게 청데이는 경극단의 일원이 된다. 청데이 또래의 경극단원들은 청데이를 매춘부의 자식이라며 손가락질 하는데, 이때 그의 편을 든든히 지켜주는 이가 바로 단샬루(아명 시투)다. *아명(儿名): 중국에선 자녀가 어릴 때 호적상의 이름과는 다른 이름을 애칭으로 부르는데, 이를 '아명'이라 한다. 

 

경극단이 많아봤자 15살도 되지 않았을 아이들을 훈련시키는 방식은 매우 폭력적이고 강압적이다. 청데이 역시 이러한 교육방식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억지로 다리를 찢고, 대사를 잘 외워도, 잘 외우지 못해도 손바닥을 맞고, 잠시만 한눈을 팔아도 곧이어 온몸에 불이 나도록 맞는 지옥. 더군다나 청데이는 경극 배우라는 꿈을 자신이 정한 것이 아니다. 핏덩이같은 자식을 맡길 만한 곳으로 그의 어머니 눈에 든 곳이 경극단일 뿐이었다. 

 

그런 청데이가 경극 배우를 자신의 꿈으로 받아들이게 된 계기는 경극단에서 도망칠 목적으로 뛰쳐나와 본 경극 무대였다. 무대 뒤에서 겪는 참혹한 연습에도 불구하고 분명 무대 위에선 경극 배우의 목소리, 손짓 하나하나에 관중이 환호를 하니까. 이때 청데이와 함께 경극단을 뛰쳐나온 한 아이가 "저렇게 되려고 얼마나 연습을 했을까"하며 눈물을 흘리는데, 청데이는 그에 한발 더 나아가 고통의 연속인 연습을 끝내고 무대 위에 선 배우의 자리에 서야겠다는 결심을 하게 된 것으로 느껴졌다. 

 

'맞아 죽을' 각오를 하고 다시 경극단으로 돌아온 청데이에겐 하나 더 뛰어넘어야 할 장벽이 있었다. '패왕별희'에서 우희역을 맡은 그는 '나는 원래 계집으로 태어나서 사내도 아닌데'라는 대사를 좀처럼 외우지 못했다. 다른 대사는 막힘없이 술술 외워되던 데이가가 손바닥에서 피가 뚝뚝 떨어질 정도로 맞아도 이 대사만은 쉽사리 입에서 내뱉지 못했다. '본래 사내'로 태어난 그가 '우희'라는 경극 속 인물에 완전히 빠져들기까지의 마지막 관문이 아닐까 하는 장면이었다. 그리고 이 관문은 경극단을 후원해주는 '장 내관'의 측근이 오는 날, 샬루의 도음으로 뛰어넘는다. 후원 여부를 고심해보겠다는 장내관 측근은 데이를 콕 집어 경극의 일부를 선보이게 했는데, 단샬루는 데이가 실수를 반복하면 정말 죽음에 이를 정도로 체벌을 받게 되리라는 것을 예상해 일부러 나서서 데이의 입에 담뱃대를 넣어 체벌을 가한다. 그리고 마침내 데이는 틀리지 않고 경극 '패왕별희'의 대사를 왼다.

 

연습대로 장 내관 앞에서 훌륭하게 연기를 펼쳐 보인 청데이와 단샬루. 항우 역을 해낸 샬루에게는 촉망받는 경극 배우로서의 길이 활짝 열렸지만, 데이에게는 기쁨과 동시에 고통이 찾아왔다. 장 내관이 데이를 따로 불러내 그를 유린한 것. 경극단의 사부는 후원을 받기 위해 데이의 고통을 알면서도 외면한다.

 

그리고, 시간이 흘러 이제 장성한 데이와 샬루는 관중들의 환호와 기대를 받으면서 무대 위에 서는 경극 배우가 된다. 항우와 우희를 연기하는 둘은 서로를 신뢰하며 탄탄대로를 걷는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둘이 살던 시대는 20세기의 중국. 일본의 침략과 국공내전, 국민당에 이어 공산당, 또 문화대혁명까지 민중을 상대로 하는 경극 배우들이 시대에 비껴 나홀로 존재할 수는 없는 일이었다. 시대의 변화에 따라 그들도 자신의 모습을 바꾸거나 혹은 바꾸도록 요구받는다. 

 

데이와 샬루가 경극 배우로서 당당히 자리잡기까지의 과정도 영화적으로 꽤나 수많은 고난을 겪는데, 성인이 된 그들이 겪을 시련은 그보다 더하다. 이 영화는 20세기 중국의 현대사의 굴곡마다 구석으로 내몰리는 두 주인공, 그리고 샬루의 아내인 주샨(공리)을 처절하게 비춘다.

 

청데이의 어린 시절, '두지'라 불리던 그때. 아역배우의 연기도 무척이나 놀라웠다. 

이 영화를 해석할 수 있는 콘텍스트가 무척 다양하다고 느꼈다. 

 

1. 시대상

수많은 사회변동에 휩쓸려가는 중국인 개인의 관점에서 봐도 흥미로운 영화다. 영화 '마지막 황제'가 떠오른 이유도 청나라 말기(패왕별희에선 청나라는 이미 멸망한 국가로 나오지만)부터 시작해 일제시대, 국공내전, 공산당 집권까지의 엄청난시대의 굴곡에 개인은 휩쓸려갈 수밖에 없는 연약한 존재라는 영화의 주제의식이 비슷해서였다. '마지막 황제'에서는 무려 청나라의 마지막 황제가 주인공이었고, '패왕별희'에서는 시대를 호령했던 경극배우가 주인공이었음에도 시대와 무관하게 존재할 수 없었다는 사실이 더 섬찟하기도 했다. 물론 시대에 따라 자신을 쉽게 바꿀 수 있는 일반 민중들이 어떤 면에선 시대와 조응하기가 더 쉬웠을까 싶기도 하는 생각이 들기도 했지만. 

 

2. 예술 

관중을 대상으로 하는 예술가는 결국 시대가 원하는 류의 예술을 선보일 수밖에 없는가, 하는 생각. 처음 경극배우로 무대에 섰을 때와 달리 새로운 시대의 관중들은 점점 경극을 찾지 않게 되는데 관중이 외면하는 예술이란 전통으로서의 의미 외에 어떤 의미를 가지는가. 온갖 체벌을 참아가며 경극이라는 문화예술에 자신의 생을 바친 데이가 시대의 변화는 차치하고라도 경극의 의미를 무시하는 이들과 마주할 때 겪는 표정들에 마음이 무너진 이유도 여기에 있다. 동시대와 호흡하지 못하는 예술은 어쩔 수 없이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질 수밖에 없는가. 전통으로서의 명맥으로만 간신히 유지되는 그정도의 존재감만 가진 채? 

 

3. 희생 

데이와 샬루, 주샨 가운데 상대를 위해 자신의 자존심과 체면을 버려가며 희생을 해 본 이는 '데이'와 '주샨'이다. 다시 말해 샬루는 사실 누군가를 위해 희생이란 걸 해 본 적이 없는 인물. 물론, 극중 어린시절 데이를 위해 체벌을 자처해 받는 에피소드는 나오긴 하지만 상대를 위해 자신의 인생 전체를 바꿀 위험이 있는 선택을 하지 않는다. 

데이는 처음 본격적으로 경극 무대에 섰을 때부터(장 내관의 앞에서) 샬루를 위한 희생을 감내했다. (관점에 따라 자신의 꿈을 위한 선택일 수도 있을 거 같긴 하다.) 장 내관의 강간, 원 대인과의 관계, 일본군 앞에서의 경극 공연 등. 이 모든 일들은 일회성에 그치고 마는 행동이 아니라 남은 생 전반을 방향을 좌지우지하고 가치관을 바꿀 수 있는 행동들이었다. 

주샨도 마찬가지. 주샨은 위기에서 자신을 구해준 샬루를 위해 샬루가 경극배우로서 가진 꿈을 이어갈 수 있도록 아니면 평범한 가정을 꾸리고 안전한 일상을 그가 꾸려갈 수 있도록 적극 나선다. 연적으로서 다투던 데이를 마침내 품고 돌보게 되는 장면마저도 그 배경엔 데이가 샬루를 위해 감내했던 희생들을 깨달았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얌체같은 샬루는? 데이와 처음 패왕별희 무대를 한 후 데이가 장 내관의 부름을 받고 어떤 고초를 겪었는지, 데이가 일본군 앞에서 그토록 소중히 하는 경극 공연을 펼친 게 누구를 위해서였는지, 자신의 꿈을 지켜주기 위해 부부의 관계에서 주샨이 얼마나 많은 것을 양보했는지 등등.. 당장 생각나는 것만 해도 이렇게 많다. 이 불균형한 셋의 관계는 문혁 때 비로소 외면적으로 폭발한다고 생각한다. 자신이 살기 위해, 데이의 행적을 고발하고 자신의 아내 주샨마저 '사랑하지 않는다'고 울부짖는 샬루. 이때, 자신을 사랑하지 않는다는 말을 들은 주샨을 연기한 공리의 표정이 뇌리에 깊이 박혔다. 

화만루에서의 주샨. 공리의 젊은 모습을 영화에서 본 적은 처음이다. 

영화 속 좋았던 장면 

- 아기(?) 두지와 그의 엄마가 경극단원들의 공연을 보면서 얼굴을 맞대는 장면. 두지 엄마 역할의 배우의 얼굴이 너무 천연해서 슬펐다. 

- 두지, 시투와 같이 경극단원이던 한 소년이 경극단의 혹독한 체벌에 끝내 목을 매 달고 죽은 장면. 경극단의 훈련 방식이 두지와 시투를 희대의 우희와 항우로 만들었지만 그 뒤엔 이런 그림자가 있다는 것을 알려줬다. 

- 두지가 입에 피를 가득 머금고 카메라를 정면으로 바라보는 장면. 

- 샬루를 구하기 위해 일본군 앞에서 경극 공연을 펼친 데이가 일본군 앞에서 경극을 했다는 이유로 샬루로부터 비난을 받고 돌아서는데, 일본군이 중국인들을 끌고 와 총살하는 장면을 목격한 장면. 같은 중국인이지만 처지에 따라 샬루는 일본인 앞에서 공연을 해 친구를 구해냈지만 누군가는 밤에 죽음을 당한다. 

- 아편을 끊기 위해 애쓰던 데이를 주샨이 이불을 덮으며 끌어안는 장면. 극 내내 반목하던 주샨과 데이의 관계가 전환의 순간을 맞이하는 순간. 

- 홍위병의 추궁에 '매춘부인 부인을 사랑하지 않는다'고 내뱉은 샬루를 보며 주샨이 세상의 모든 희망의 끈을 놓아버린 듯한 표정을 짓는 장면. 주샨이 너무 애처롭게 느껴졌고, 화만루를 떠날 때 그녀가 들은 한 대사가 떠오르기도 했다. 

 

주샨, 샬루, 데이 

+) 

여담이지만 샤오로우를 '샬루', 디예를 '디예'로 표기한 자막이 거슬렸다. 중국어 표기법 어떻게 해야 한국인들한테 안 어색하냐구요ㅜㅜ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