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강 작가의 신작이 나온다는 소식에 설레서 출간되자마자 서점에서 책을 집어 들었다.
집으로 가는 버스에서 읽을까도 생각했지만 그렇게, 쉬이 읽어선 안 될 것 같았다. 5월의 광주의 이야기.
한강 작가는 이 이야기를 어떻게 다룰까. 어떤, 또 가슴아픈 사람들의 이야기로 5월의 광주를 녹여낼까.

<소년이 온다> 북트레일러(Book Trailer)

영상 중 나레이션은 한강 작가가 직접 녹음한 것!!!!! 

'북트레일러'라는 게 아직 좀 생소하지만

영화의 예고편을 영화 트레일러라고 하듯이

새 책을 소개하며 예고하는 영상을 '북' 트레일러라고 부른단다. 


<소년이 온다>는

에필로그를 제외하고 총 6장으로 구성돼 있다.

1장 어린 새

2장 검은 숨

3장 일곱개의 뺨

4장 쇠와 피

5장 밤의 눈동자

6장 꽃 핀 쪽으로


각 장의 중심인물은 전부 다르지만 서로 연관돼 있는 인물이다.

5월의 광주 당일에 대한 이야기도 틈틈이 기술돼 있지만

그 날 이후, 그 날 현장에 있었던 인물들이 어떤 기억을 가지고 어떻게 살아가고 있는가를 다뤘다.


#. 

집에 세들어 살고 있는 정대의 행방을 찾아 나선 동호라는 한 아이는 결국 도청에 남아 마지막까지 계엄군에 맞선다

사실 동호는 정대의 행방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다.

정대와 함께 정대의 누나를 찾아나서다가 갑작스럽게 군과 충돌하면서 정대는 계엄군에 의해 죽음을 당하고

동호는 그것을 숨죽여 지켜본다. 


마지막으로 정대를 본 건 동네 사람이 아니라 바로 너였다.

모습만 본 게 아니라, 옆구리에 총을 맞는 것까지 봤다.

....

네가 뛰처냐가려는 순간, 입을 막고 떨던 아저씨가 네 어깨를 붙들었다.

...

지금 나가면 개 죽음이여.

아저씨가 네 눈에서 손을 뗀 순간, 마치 거대한 자석에 이끌린 것처럼 

맞은편 골목의 남자 둘이 쓰러진 젊은 여자를 향해 달려가 팔을 잡고 

일으키는 것을 너는 봤다.

이번엔 옥상에서 총성이 울렸다. 남자들이 나동그라졌다.

더이상 아무도 쓰러진 사람들을 향해 달려가지 않았다. (동호)


너를 문득 떠올린 건 그 낯설고 생생한 밤이 끝나갈 무렵, 먹색 하늘에 마침내 파르스름한 새벽빛이 배어들기 시작하던 무렵이었어. 

그렇지, 네가 나와 함께 있었는데 . 

차가운 몽둥이 같은 게 갑자기 내 옆구리를 내려치기 전까지.

내가 헝겊 인형처럼 고꾸라지기 전까지.

아스팔트가 산산이 부서질 것 같던 발소리들, 고막을 찢는 총소리들 속에서 내가 팔을 뻗어올릴 때까지.

옆구리에서 솟구친 피가 따뜻하게 어깨로, 목덜미로 번지는 걸 느낄 때까지.

그때까지 네가 함께 있었는데. (정대)


국화빵 봉지를 스웨터 속 왼쪽 가슴에 품고 누나가 기다리는 집으로 달렸지, 두발은 얼어서 아무 감각이 없었지,

심장만 활활 타는 것 같았지.

키가 자라고 싶었지.

팔굽혀펴기를 마흔번 연달아 하고 싶었지.

언젠가 여자를 안아보고 싶었지. 나에게 처음으로 허락될 여자,

얼굴을 모르는 그 여자의 심장 언저리에 떨리는 손을 얹고 싶었지. (정대)


모두가 그녀에게 귀엽게 생겼다고 말하던 때가 있었다. 

논 코 입이 조금씩 튀어나온 게 밉지 않고 귀엽구나, 머리는 꼭 흑인 댄서 같구나, 미용실에서 파마 안해도 되겠다야.

그러나 열아홉살의 여름이 지나자 누구도 그녀에게 그런 말을 하지 않았다.

이제 그녀는 스물네살이고 사람들은 그녀가 사랑스럽기를 기대했다.

사과처럼 볼이 붉기를, 반짝이는 삶의 기쁨이 예쁘장한 볼우물에 고이기를 기대했다.

그러나 그녀 자신은 빨리 늙기를 원했다.

빌어먹을 생명이 너무 길게 이어지지 않기를 원했다. (은숙)


내 손으로 너를 묻었은게. 하늘색 체육복에다 교련복 윗도리를 입고 있던 너를,

하얀 하복 샤쓰에다 아래위 까만 동복으로 갈아입혔은게. 

혁대도 단정하게 매주고 깨끗한 회색 양말을 신겼은게.

베니어판으로 짠 관에다 너를 넣고 청소차에 싣고 갈 적에, 너를 지킬라고 내가 앞자리를 탔은게.

청소차가 어디로 가는 줄도 모르고, 네가 있는 뒤쪽만 뚫어져라고 지켜보고 있은게. 


네 중학교 학생증에서 사진만 오려갖고 지갑 속에 넣어놨다이.

낮이나 밤이나 텅 빈 집이지마는 아무도 찾아올 일 없는 새벽에,

하얀 습자지로 여러번 접어 싸놓은 네 얼굴을 펼쳐본다이.

아무도 엿들을 사람이 없지마는 가만가만 부른다이.

동호야.... 


엄마, 저쪽으로 가아, 기왕이면 햇빛 있는 데로.

못 이기는 척 나는 한없이 네 손에 끌려 걸어갔제. 

엄마아, 저기 밝은 데는 꽃도 많이 폈네.

왜 캄탐한 데로 가아, 저쪽으로 가, 꽃 핀 쪽으로. 


이 책의 모티브는 한강 작가의 아버지 한승원이 교편을 잡고 있을 때 가르쳤던 한 소년에게서 왔다고 한다.

관련 내용은 에필로그 '눈 덮인 램프'에 나와있다.

에필로그는 아직까지 제대로 안 읽어 봤다 ㅠ^ㅠ


장편소설치곤, 꽤 얇은 두께여서 빨리 읽을 순 있지만

빨리 읽기엔 아까운 책이다. 

사실, 빨리 읽기에는 책의 문장, 단어, 글자가 주는 감정이 너무 격하게 다가와서

생각하고 의미를 되새기는데 시간이 꽤 걸린다고 할 수 있다.


특히 마지막 6장. 죽은 동호를 그리워하는 동호 어머니의 시점에서 글이 서술됐는데

이전의 5장보다 슬픔이 밀려와서

카페에서 읽다가 눈물을 쏟을뻔했다.


#.

이번 학기 듣는 한 개론 수업이 있는데

5월 중순 이후부터는 '기억' '기념' 등에 대해 배웠다.

제노사이드에 관한 연구를 하신 교수님은 과거의 사건을 어떻게 기억하고 기념해야하는지에 대해 얘기하셨다.

사실 수학문제처럼 정확한 답이나 명확한 해결책은 없지만 

5.18이나 제주4.3과 같은 사건에 대한 기억을 어떻게 형성해야 할 지는 분명 중요한 문제다.

사건을 직접 겪은 이들은 시간이 지나면서 줄어들기 마련이기에

그 후대의 사람들인 우리가 그 기억을 이어가야 하는데

그 기억, 기념의 방식이 피해자들이 보기에도, 후대인 우리가 보기에도

모두 충족시킬만한 방식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

한강 작가의 작품 중 내가 제일 좋아하는 건 <바람이 분다, 가라>였다.

이 작품을 얘기하면 백이면 백, 이병률 작가의 <바람이 분다>를 떠올리는 사람들이 많다ㅠㅠ

<바람이 분다, 가라>는 두번째로 읽은 한강 작가 작품이었는데

문체나 내용이나 작품 후반부의 반전 아닌 반전(?)이 있어 책을 다 읽어도 긴 여운이 남았었다. 

이후에 읽은 채식주의자나, 노란무늬영원, 시집 등등등도 좋았지만 이 책을 따라잡을 순 없다고 생각했었다.

근데 <소년이 온다>는 거의 이 책이랑 비등비등할 정도로 정말정말정말 감동감동!이다.

한번 더 읽고 싶지만

책을 읽으면서 느껴지는 감정이 너무 쉽게 휘몰아쳐져서 

마음이 좀 더 안정됐을때, 이 책을 좀 잊었을 때 다시 꺼내서 읽어보아야겠다. 




효에게. 2002. 겨울


바다가 나한테 오지 않았어.

겁먹은 얼굴로

아이가 말했다

밀려오길래, 먼 데서부터

밀려오길래

우리 몸을 지나 계속

차오르기만 할 줄 알았나 보다


바다가 너한테 오지 않았니

하지만 다시 밀려들기 시작할 땐

다시 끝없을 것처럼 느껴지겠지

내 다리를 끌어안고 뒤로 숨겠지

마치 내가

그 어떤 것,

바다로부터조차 널

지켜줄 수 있는 것처럼


기침이 깊어

먹은 것을 토해내며

눈물을 흘리며

엄마, 엄마를 부르던 것처럼

마치 나에게

그걸 멈춰줄 힘이 있는 듯이


하지만 곧

너도 알게 되겠지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기억하는 일뿐이라는 걸

저 번쩍이는 거대한 흐름과

시간과

成長,

집요하게 사라지고

새로 태어나는 것들 앞에

우리가 함께 있었다는 걸


색색의 알 같은 순간들을

함께 품었던 시절의 은밀함을

처음부터 모래로 지은

이 몸에 새겨두는 일뿐인 걸


괜찮아

아직 바다는 오지 않으니까

우리를 쓸어 가기 전까지

우린 이렇게 나란히 서 있을 테니까

흰 돌과 조개껍데기를 더 주울 테니까

파도에 젖은 신발을 말릴 테니까

까끌거리는 모래를 털며

때로는

주저앉아 더러운 손으로 

눈을 훔치기도 하며


- 한강 <서랍에 저녁을 넣어 두었다>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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