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년 전쯤 사두고 꺼내보지 않았던
김영하 작가의 <살인자의 기억법>
제목이 끌려서 사두고는 나몰라라 하다가
지난 겨울방학 때 집어들고
읽기 시작하다가 어느새 김영하 작가의 소설에 푹 빠져버렸다..
그 뒤에 읽은 소설이 <나는 나를 파괴할 권리가 있다>인데
프랑수아즈 사강의 유명한 말을 따온 이 제목의 책은
매우 특이하면서, 재밌고, 또 우울하기도 하고 신선하기도 했다
무엇보다 이 책이 96년도에 출판되었던 책이라니
(그 당시 나는 한글을 채 떼기도 전인 꼬꼬마였을 텐데 말이다)
20년 전에 쓰인 책이 이렇게 지금까지도 어색함없이 읽힐 수 있다니!
20년 전 드라마나 영화는 보기만 해도 오글거릴 정도의
패션과 대사가 가득한데
문학작품은 몇 백년 전의 고전부터해서
현대소설마저도 몇 십년 전 것까지
지금 읽어도 전혀 위화감이 없어, 오히려 잘 읽히다니
이게 글, 활자의 힘인가 싶어 새삼 놀랍다.
그 다음에 읽은 김영하 작가의 책은 중국에 와서 읽은 것인데
인터넷이 워낙 느리고, 데이터도 하나같이 다 비싸고 돈을 내야하는 이 곳에서
자기 전, 휴대폰을 만지며 놀던 습관을 가진 나에겐 감옥처럼 느껴졌는데
그래서 생각해낸 게 '전자도서관'!
한국에서도 이미 어플로 많이 이용하던 터라
와이파이가 터지는 곳에 가서
우리학교 전자도서관에 있는 김영하 작가의 소설을
주주주주죽 다운받아 자기전에 조금씩,
학교가기 전 시간이 남을 때 조금씩
보고 있다.
벌써
<너의 목소리가 들려>
<빛의 제국>
을 읽었고
지금은 <퀴즈쇼>를 읽고 있는데
김영하 작가의 소설을 읽다보면
일상의 감정, 사물, 행동들에 대한
작가 특유의 관점을 녹여 낸 부분이 많다는 걸 알 수 있는데
<퀴즈쇼>의 주인공이 내 또래라서 그런지(아, 물론 나이는 많다만)
취업과 인생, 가난에 대한 내용은
밑줄을 그어가며 읽어야 할 것 같은 느낌까지 든다.
1. 김영하 <퀴즈쇼>
"우리는 초등학교 때부터 지금까지 아침부터 밤까지 책상 앞에 앉아 공부만 했는데,
부모나 선생이 하라는 거는 얌전히 다 했는데, 왜 이렇게 된 거야?
세상은 죽이는 스터프들, 머스트 해브 아이템으로 가득 차 있는데
왜 우리 주머니에는 그걸 살 돈이 없는 거야?
일 인당 국민소득 이만달러라더니, 다 어디로 간 거야?
우리가 왜 이렇게 사는지 알아?
내 생각엔 우리가 너무 얌전해서 그래. 노땅들이 무서워하질 않잖아. 생각해봐.
386들은 손에 화염병을 들고 있었다구. 우리를 무서워해야
일자리도 주고 월급도 올려주고 그러는 건데,
이 놈의 대기업들은 채용은 안 하고 대학에 건물만 지어주고 앉아 있잖아.
누가 건물 필요하대?"
사실 어른들은 우리 세대가 책도 안 읽고 무능하며 컴퓨터 게임만
한다는 식의 이미지를 갖고 있찌만 그건 완전 착각이다.
정작 책도 안 읽고 무능하고 외국어도 못하면서 이렇다 할 취미도 없는
사람들은 그날 면접장에 앉아서 나를 내려다보던 면접관들이지 우리가 아니다.
우리는 80년대에 태어나 컬러TV와 프로야구를 벗삼아 자랐고 풍요의 90년대에
학교를 다녔다. 대학생 때는 어학연수나 배낭여행을 다녀왔고 2002년 월드컵에
우리나라가 4강까지 올라가는 걸 목격했다.
우리는 외국인에게 주눅들어보지 않은, 다른 나라 광고판에서 우리나라 배우의
얼굴을 볼 수 있는 첫 세대다.
....
한마디로 우리는 우리 윗세대와는 완전히 다른 나라에서 자라났고
이전 세대에 비하자면 거의 슈퍼맨이라 할 수 있다.
우리는 후진국에서 태어나 개발도상국의 젊은이로 자랐고
선진국에서 대학을 다녔다.
그런데 지금 우리에겐 직업이 없다. 이게 말이 돼??(밑줄 백번!!!긋자!)
2. 김영하 <빛의 제국>
그녀는 문득, 엄마가 된다는 것은 무슨 의미일까,
그런 일이 과연 자신의 인생에 닥쳐올까, 따위를 생각했다.
끔찍하기만 할 거라 생각했지만 그것은 키스도 마찬가지가 아니었던가?
그러나 아까처럼, 끔찍했던 어떤 일들이 아무렇지 않게 여겨지는 것,
그런 일이 반복되는 것, 혹시 그런 게 인생이 아닐까.
할리우드 영화의 뻔함에 지쳤고 그러다보니 찾아찾아
그 모든 클리셰가 시작된 곳까지 거슬러올랐고
그 결과 진심으로 루치노 비스콘티나 오즈 야스지로를 좋아하게
됐을 수도 있는 사람들인 것이다.
"태극기가 바람에 펄럭입니다."
국기게양대를 지나며 저도 모르게 노래를 흥얼거렸다.
그가 이 노래를 배운 것은 스무 살이 다 되어서였다.
코흘리개들도 아는 것을 뒤늦게 배우는 것이야말로
피할 수 없는 이민자의 운명이다.
3. 김영하 <나는 나를 파괴할 권리가 있다>
고통스럽고 무료하더라도 그대들 갈 길을 가라.
나는 너무 많은 의뢰인을 원하지 않는다.
그리고 무엇보다 이제는 내가 쉬고 싶어진다.
내 거실 가득히 피어있는 조화 무더기들처럼 내 인생은
언제나 변함없고 한없이 무료하다.
사람을 기다리는 시간은 유쾌하다.
그 시간 동안은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좋다.
책을 읽어도 되고 지나가는 사람을 구경해도 재미있다.
적어도 그 시간만큼은 어떤 부채의식에도 시달리지 않을 수 있다.
뭔가를 해야 한다는 강박에서 자유롭다.
반대로 누군가를 기다리게 하는 일은 불쾌하다.
그 시간은 사람을 조급하고 비굴하게 만든다.
그래서인지 C는 언제나 누군가를 기다리고 있다.
가끔 허구는 실제 사건보다 더 쉽게 이해된다. 실제 사건은
이야기를 풀어나가다보면 구차해질 때가 많다. 그때 그대
필요한 예화들은 만들어 쓰는 게 편리하다는 것을
아주 어릴 때 배웠다.
나는 이런 식으로 이야기를 만들어내는 일을 즐겼다.
어차피, 허구로 가득한 세상이다.
'일상 > 독서' 카테고리의 다른 글
레이 황 - 1587년 아무 일도 없었던 해 (0) | 2015.12.08 |
---|---|
<윤미네 집> 윤미 태어나서 시집가던 날까지 (0) | 2015.11.18 |
[웹툰] 나는 귀머거리다 - 귀여운 주인공이 전하는 장애인의 이야기 (0) | 2015.02.05 |
즐겨보는 웹툰들. 낢이사는이야기/어쿠스틱라이프/한줌물망초/ (0) | 2014.12.26 |
히가시노 게이고 <백야행> (1) | 2014.07.07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