갓 개봉한 영화를 이렇게 바로 보다니. <남한산성>은 보고 싶은 영화 리스트에도 없었는데 삼촌이 보자해서 얼떨결에 봤다. 원래 제사 끝나고 바로 집에 올 계획이었는데ㅠ-ㅠ 어쨌든 명절날 엄빠, 삼촌&사촌동생이랑 영화보는 것도 처음이라 색달랐다. 좀처럼 친하지 않은 친척사이라서 더욱.

 

설마 그 김훈 <남한산성>인가 했는데 맞았다. 감명깊게 읽었던 것 같은데 어떤 인상이었는지 전혀 기억이 안난다. 독후감이나 짧은 메모, 아니면 이렇게 블로그에 남기는 거 제발 습관들이자. 책 읽는 거 아깝지 않게!

 

1.

마치 책의 장처럼 총 10개의 장으로 나눠져 있다. 그래서 책의 소제목을 그대로 따왔나 했는데 또 그건 아니다. 무슨 효과를 주고 싶었던 건지 모르겠다. 이런 영화 잘 안보는 아빠는 10개장으로 나뉜 것에 영화가 너무 길다고 느끼셨다고.

 

2.

나는 그래도(?) 사학과니, 더욱이 명청나라는 전공시간 때 꽤 다뤄서 그런지 흥미롭게 봤다. 혼자 흥미롭게 느낀 포인트가 여럿이었는데

 

대표적으로

- 청과의 화친에 반대하는 신하들이 임진왜란 때 우릴 도와준 명나라를 배신할 수 없다하는데 당시 명나라 황제였던 만력제는 명나라 멸망의 초석을 깔았던 것으로 아주 유명한 왕이라는 점. 지금도 그렇지만 특정 국가 지도자를 바라보는 대내외 평가는 이렇게 다르다ㅎ_ㅎ

 

- 영화 내용 중, 새해가 되면서 전쟁통 중에, 것도 명나라와의 관계를 끊을 것을 빌미로 남한산성을 둘러싸고 청나라 군대가 와있는 상황에서도 조선의 조정은 명나라를 향해 예를 올린다. 이것을 보고 있는 칸을 비롯한 청나라 신하들은 이를 매우 비웃는다. 물론 홍타이지는 인정해주는 척(?)하긴 하지만... 중화사상에 대한 예, 유교사상 등은 기마민족으로부터 목숨을 구해주지 않는다.  

하지만 <마지막 황제>에서 푸이가 어떻게 비극을 맞았는지 생각해보라. 정말 지독한 역사의 아이러니다. 청은 명을 비웃었겠지만, 결국 자신들도 중화사상의 핵이 되고 싶다는 욕망이 있었고 끝내 그것을 이뤄냈다. 오랑캐라 비웃음 당하던 홍타이지가 왜 조선의 왕에게 예를 갖추라 요구했겠으며, 또 자신들 가운데 명문가를 찾아 서신을 보내려고 했을까. 무(武)로서의 강점을 갖고 문(文)으로 대표되는 명을 짓눌르지만 문을 무로 교체하려는 게 아니라 자신들 역시 문으로서 세상을 휘어잡고 싶었던 것이다. 문의 강점은 여기서 나오는 게 아닐까 싶기도 하고.

 

3.

또 요새 유발 하라리 <사피엔스>를 읽고 있어서 그런지(아, 진짜 재밌는데 진짜 끝이 안보이는 책ㅋㅋㅋㅋ) 관련해서도 생각이 많이 들었다. 역시 현재 읽고 있는 레퍼런스는 어떻게든 내 사고에 영향을 미친다.

 

유발 하라리가 여러 차례 반복하는 '상상의 질서'가 영화 보는 내내 떠올랐다. 상상의 질서는 특정 사회나 공동체를 유지하게끔 만드는 것으로 예를 들어 국가, 화폐, 종교 더 세부적으로 들어가면 신분계급에 대한 믿음, 자본주의에 대한 신뢰 등이다.

 

아마 남한산성이 배경이 된 조선시대의 '상상의 질서'는 '신분질서', '중화사상' 등일 텐데 조선 중후기로 내달을 즈음이니 이 상상의 질서가 흔들리고 있는 단서가 여럿 나온다.

 

- 대장장이로 나온 고수의 동생역을 맡은 인물이 예조판서 김상헌(김윤석)에게 대드는 장면이 그 예인데 나는 영화를 보면서 이 역의 대사가 튀는 게 아닐까 생각이 들 정도로 어색하게 느껴졌다. 아무로 전쟁통이고 왕과 사대부의 권위가 바닥에 떨어진 상황일지라도 사대부의 피라미드에서 가장 높은 위치에 있는 인물에게 당시 가장 천한 신분이었던 이가 얼굴을 맞대며 저항의 말을 할 수 있는 것 자체가 픽션아닌가? 갑오개혁에서 신분제가 없어진 후에도 노비들은 한동안 여전히 주인들을 주인으로 모셨다는 일화는 유명할 정도인데. 나라의 명운이 다해간다 할지라도 아직은 조선시대의 질서가 굳건한 상황일텐데 말이다. 좀 아쉬운 지점.

- 김윤석과 고수의 맞절 장면 * 이병헌(최명길 역)과 김윤석(김상헌 역)의 마지막 대화 장면은 매우 인상적이었다. 영화를 보면 김상헌은 시대의 변화를 감지하지 못하는 인물로 보이고 최명길은 주화파로 유연한 인물처럼 그려진다. 그런데 남한산성에 갇혀 있으면서 변하는 시대와 미래를 제대로 꿰뚫어 본 것은 김상헌이라는 걸 알려주는 장면이었다. 최명길은 왕과 백성들이 함께, 모두가 잘 살 수 있는 길이 있다는 믿음으로 청과의 수교를 외쳤다. 반면 나루와 대장장이 서날쇠, 그의 동생 등 병자호란이 아니었으면 그러한 신분과 대화조차 하지 않았을 김상헌은 남한산성 안에서의 경험을 통해 '모두가 잘 살 수 있는 길'은 결국 기존의 낡은 것(명과 조선, 두 국가를 이어주었던 중화주의, 결국은 신분제까지 포함하는 모든 낡은 것)에서 벗어나야 함을 느꼈다. 이를 알지만 자신이 받아들이기엔 자신 역시 낡은 질서에 젖어있는 인물이었음을 너무나 잘 알기에 마지막에 자살을 선택한 것처럼 느껴졌다.

 

4.

시국이 시국인 만큼, 어쩌면 지정학적으로 폴란드와 더불어 가장 불행한 나라로 꼽히는 한반도라는 바꿀 수 없는 운명이 존재하는 한 이 영화가 주는 메시지는 언제 보아도 강렬할 것이다.

 

5.

김상헌과 최명길의 긴 설전을 보여주는데도 관객의 마음이 한쪽으로 치우쳐지지 않게 그려낸 것이 좋았다. 강렬한 신념, 자기가 몸 딛고 선 사회(여기선 국가)를 위한다는 마음이 정치인의 기본 덕목인 것 같다. 말에 책임은 지지 않고, 자신의 목숨 하나 담보로 걸지 못하 캐릭터(정작 자신의 말 한마디에 수십, 수백이 죽는다)는 영화 후반부 내내 등장마다 관객의 (비)웃음을 샀다. 현실도 다르지 않겠지?

 

6.

박해일은 유약한 왕에 너무 잘 어울리는 이미지다.

박희순이 연기한 이시백은 뿌리깊은나무에서 조진웅이 맡았던 무관 느낌. 자신의 목숨을 내걸고 나라를 위해 싸우는 무관 역은 누가 맡아도 존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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