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주에 다녀오고 저녁에도 일할 거리가 있음에도 밤 여덟시 넘어 영화를 보러 갔다. 영화가 끝나면 열시가 넘을테고 그때부터 일을 시작하면 새벽에나 잘 수 있을 거라 생각해서 영화를 취소할까, 고민했지만 극한의 상황에서 대책없이 일을 미뤄둘 것 같지는 않아서 그냥 영화를 봤다. 그렇게 본 영화가 그레타 거윅이 극본을 쓰고 연출까지 맡은 <레이디버드>다. 

1.

그레타 거윅이 출연한 영화 가운데 내가 본 영화는 단 두편 <프란시스하>와 <매기스플랜>이다. 두 영화다 너무 취향저격이라 외국 배우 이름을 한번에 잘 기억 못하는 내가 '그레타 거윅'의 이름은 단번에 외웠다. 특히 <매기스플랜>은 영화의 웃음포인트가 너무너무너무 좋았어서 영화관에서 입을 틀어막고 웃은 기억이 아직까지도 날 정도. 

<레이디버드> 역시 그레타거윅이 출연하진 않아도 그녀가 극본, 감독을 맡은 영화라기에 신뢰감이 갔다. 더군다나 평도 꽤 괜찮아서 바로 택했다.

2.

<레이디버드>는 18살 소녀의 성장영화인데 10대라면 누구나 겪었던 감정들을 세밀하게, 그러면서도 너무 각잡거나 진지하게만 다루지 않는다. 크리스틴이란 이름을 가진 캘리포니아의 세크라멘토라는 평범하디 평범한 도시에 사는 소녀는 자기가 가진 평범성을 싫어한다. '평범'이라는 단어가 주는 안정감을 어른들은 이해하지만 십대라면 '평범'은 재미없고 따분하게만 느껴지는 단어일테니까. 이건 크리스틴을 포함한 모든 십대들이 겪는 감정일테다.

그래서 크리스틴은 자기 스스로가 부여한 이름 '레이디버드'를 자기 이름으로 소개하고 세크라멘토를 떠나 늘 뉴욕이나 미국 동부 도시로 떠나고 싶어한다. 학교에서도 늘 주목받는 무리의 친구들과 어울려하고 싶어해 친한 친구와 멀어지기도 한다. 

3.

내가 이 영화에 반한 이유는 딸-엄마의 모녀관계를 다룬 부분 때문이다. 특히 인상적이었던 부분은 무도회에 가기 위해 드레스를 고르는 레이디버드가 탈의실에서 옷을 갈아입는 동안 그 밖에서 그녀를 기다리는 엄마와의 대화 장면이다. 

레이디버드는 엄마가 자신을 좋아하지 않는다고 말하자 엄마는 "널 사랑한다"고 말한다. 하지만 레이디버드의 반격, "지금 있는 그대로의 날 좋아하진 않잖아!"

부모-자식의 관계는 당연히 사랑이라는 감정으로 묶여져 있을테지만 과연 '사랑'이라는 의무감에서 벗어나 상대를 진심으로 좋아하고 있는 것이라는 의무감이 들 때가 있었다. '있는 그대로'의 자식 모습, 부모 모습을 좋아하는 가정이 얼마나 될까 싶었던 것. 

나의 케이스를 이야기해보면,

내가 무척이나 사랑하는 엄마 역시 자식인 언니와 나를 무척 사랑하신다. '부모의 사랑'에 대해선 의심해본 적 없이 자라났다. 하지만 가끔, 내가 열심히 살지 않고 게으르고 나약한 모습일 때도 엄마는 지금의 나를 좋아할까, 라는 생각을 해본 적 있다. 자식이 늘 최고이길 바라는 게 모든 부모의 바람이라지만, 나는 사실 자식이 가장 초라할 때 그 사람을 곁에서 지켜주는 사람이야말로 부모여야 한다는 생각을 한다. 물론, 자식 낳아본 적 없는 사람의 철 모르는 소리일 수도 있지만.

그래서 저 장면을 보면서, 대체적으로 유쾌하게 흘러가는 이 영화가 사실 얼마나 세밀한 포인트를 잘 짚고 있어 내고 있는지를 알았고 그때 이 영화에 완전히 반했다. 

4.

저 장면 외에도 레이디버드가 엄마의 편지를 읽는 장면이나, 레이디버드를 공항에서 떠나보낸 엄마가 집으로 돌아가는 차안에서의 우는 씬은 은 영화를 본 사람이라면 누구나 꼽을 명장면일 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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